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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도와주세요. 제 남자 친구가 연락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제 남자 친구 어머님께 전화가 왔는데, 외국 나가면 원래 연락이 안 되느냐며 묻는 겁니다. 뜬금없이 웬 해외? 남자 친구가 출국을 했다는 겁니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근데 어머님 말씀이, 해외에 취직해서 갔다는 거예요. 더 이해가 안 됐죠. 남자 친구가 몇 개월 동안 취업 준비 중이긴 했는데, 갑자기? 영어도 잘 못하는 사람이?
그러다 순간 얼마 전에 읽은 신문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월급 500만원짜리 일자리라며 한국인들을 불러낸 뒤 납치·감금한다는 소식요. 고문과 폭력으로 반항 못 하게 하고 돈 뜯고 보이스피싱 시킨다 생활의 발견 는, 그거 말이에요. 깜짝 놀라서 어머님께 ‘혹시 캄보디아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건 잘 모르겠다네요. 어떡하죠? 진짜 납치당한 거면 어떻게 해야 하죠?
모든 게 제 탓 같아요. 사실 남자 친구가 연락이 안 되기 전에 크게 싸웠습니다. 둘 다 집안 사정이 안 좋거든요. 5년간 만나면서 결혼은 말도 못 꺼내고 포기 중이었는데, 어느 날 남자 비면제 친구가 그냥 작은 전셋집이라도 얻어서 같이 살자는 겁니다.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작은 전셋집은 아무나 얻느냐고요. 제가 좀 심한 말을 했거든요. 근처 제일 싼 전세 보증금이 4200만원인데, 너 4200만원 있느냐고. 4200만원도 없는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고. 4200만원도 없는 거지들이 무슨 결혼이냐고…. 그날 이후 냉전 상태였는데, 갑자기 ‘나를 믿 마이너스통장 만기 어달라’면서 전화가 온 거예요. 취직해서 금방 4200만원 벌어 온다고요.
제가 그렇게 모질게 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죠? 제발 도와주세요. 남자 친구 어머님은 혹시 모르니 연락이 올 때까지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데, 현실을 인정하기 싫으신 건지 어떤 건지….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겠죠? 차라리 어머님 말씀대 카드론과 현금서비스 로 아직 자리 잡느라 연락을 못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네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이 안타까운 온라인 게시글에는 역시나 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곱씹어볼수록 진짜 동남아 납치 감금 사건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후 그녀가 추가 게시글로 밝힌 남자 친구의 스펙이나 환경·정황 등을 따져보면 말입니다. 일단 댓글의 대세에 따라 경찰서에 가서 취업자금대출 신고는 했다지만, 수사가 수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외국이니까요. 그나마 가장 희망적인 댓글이 뭐였느냐면, 언론사의 취재가 시작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거였죠.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서 수사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으니까요. 며칠 뒤, 이런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방금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는데요. 누가 봐도 흔한 보이스피싱이라서 살짝 놀려줄 생각으로 계속 안 끊고 ‘돈이 없다’면서 빙빙 대화를 끌었거든요. 결국 이 피싱범이 제 장난을 눈치챘는지 소리를 지르고 끊는 겁니다. 근데 전화를 끊고 보니 좀 이상한 거죠. 피싱범이 계속 소리 지르는데 이상했던 대목이 뭐였느냐면요. ‘넌 4200만원도 없냐, 거지 새끼야.’ 액수가 이상하잖아요? 그때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 사연이요. 혹시 그 피싱범이 그분의 남자 친구인 걸까요? 강제로 보이스피싱에 동원되고 있는 걸까요?”
이 게시물이 화제가 되고 며칠 뒤, 또 비슷한 통화 인증이 올라왔습니다. “저도 그 피싱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색하지 않은 한국인 발음이었는데, 소리 지를 때 진짜 ‘4200만원도 없냐, 거지 새끼야’라더군요. 정확히 4200만원이었습니다. 그분 맞는 것 같은데요?” 난리가 났죠. 그녀도 댓글 창에 등장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맞는 거 같다면서요. 전화번호가 뭐였느냐고요. 보이스피싱 태그를 단 인증 글이 잇따랐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제보가 올라왔습니다.
“4200만원 보이스피싱 여자 친구 분 계십니까? 연락 바랍니다. 저도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떠봤죠. ‘4200만원 전세금 낼 돈도 없다, 결혼도 못 하고 있다’고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울먹이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최대한 침착하게 정보를 유도해 냈거든요? 연락해 주시면 제가 알아낸 것들 알려드리겠습니다.” 댓글 창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남자 친구를 구출했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4200만원의 기적이 일어난 거죠. 이 사연을 짧은 웹드라마로 제작할 예정인데, 제목을 뭐로 해야 할까요? ‘전세금 때문에 죽다가 살아났다’라는 제목은, 너무 씁쓸하려나요?
※픽션입니다.